2020년 06월 10일 일일명언

가장 어두운 밤도 끝날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우리가 아는 어두운 밤은 길때도 있고 짧을때도 있다. 밤을 짧게 느끼는 순간은 주변 사람들 덕분에, 혹은 가로등 불빛이나 밝은 달 빛 덕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럴땐 대부분 그 밤을 즐기고 있을뿐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밤이 유독 길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순간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밝아지지 않을까봐 겁이나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상황.
이렇게 같은 밤도 같은 시간을 지내는 것인데도 누구는 그 순간을 즐기고 누구는 그 순간을 두려워한다.
반 고흐의 저 한마디는 후자의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좋은 메시지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밤을 마냥 즐기는 사람에게도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메시지가 된다. '그 밤을 즐기는 것은 네 자유지만,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현실적으로 밤은 느낌상 깊더라도, 혹은 얕더라도 분명히 지나간다. 어둡던 밤은 밝아오는 새벽과 바톤터치를 할테고, 새벽은 태양을 데리고 온다.
그 덕분에 이내, 세상은 밝아진다. 아무리 구름들이 태양이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다 하더라도 밝아오는 온 세상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니, 태양이 보이지 않더라도 안심하자. 밤은 지나갔고 우리의 날이 밝아왔으니까.

뭔가 감이 오지 않는 길을 가다가 긴 터널 같은 공간을 만난다고 한다면, 그래서 밤이 지속되고 밝아오는 태양을 만나기 힘든 상태라고 느낀다면 제대로 생각해보자. 긴 터널이라면 더욱이, 무조건 중간마다 쉬어갈 수 있는 길이 있고, 불빛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져있다.
어찌보면 어두운 터널을 지난다고 하겠지만
반대로 365일 24시간 밝은 빛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곳을 지나쳐왔을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터널의 중간에는 꼭 대피할 수 있는 통로가 있고, 우리의 어둠또한 그렇다.마냥 태양을 기다리다가 오래걸리는것 같다면 자기만의 빛이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보자.

그렇게 능동적으로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레 어둠을 만나도 곧 빛도 찾아오리란걸 깨달을테니까. 어두움을 두려워 말자. 그 어둠에서도 가만히 눈을 뜨고 근처를 천천히 훑어보면 우리의 눈은 적응시로 천천히 근처를 보여줄테니. 어느 어둠이든 완전한 어둠은 없고, 어떤 두려움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만약 완전한 어둠과 영원한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의 산물일뿐. 스스로 만들어낸 어둠과 두려움에 속지말고 진짜 어둠이 찾아와도 스스로 빛을 만들어 그것들을 헤쳐나가자. 묵묵히, 앞으로.

2020년 06월 09일 일일명언

누가 감히 남의 통증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다.

-박완서<살아있는 날의 시작>中-

통증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남이 그 통증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는 말 중에 '말도 못하게 아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통증을 느낀다고 하곤 한다. 아무리 동일한 업무를 해보았고 같은 아픔을 겪어보았다고 한들 똑같이 그 아픔에 대해, 통증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단언컨데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상황과 자라온 환경, 함께 있었던 사람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서 같은 아픔, 통증을 느끼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타인이라면 그걸 어떻게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거든,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듬어 주고 싶거든 입을 열지말고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귀를 열고 얼굴의 표정을 풀어라.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경청하는 일과 최대한 그 마음을 이해하며 느껴지는 것을 표정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니까. 절대 입은 열지않되 마음만은 활짝 열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쉬운일이 아닐뿐더러, 그것이 속상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라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어지거나, 그 상황을 상상하며 분석하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될테니까. 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순간, 당신은 앞에 앉은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는것엔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그저 나라면 어땠을지를 떠올려보며 어떤 대처방안이나 앞으로 어떻게하면 좋을지 대답해주려 할테니까.
아픔을 느낀 사람은 온전히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고 슬퍼하고 잊을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권리를 양도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아픔이 온전히 자기의 것임을 말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구든 속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생각을 제대로 하자. 지금 이 상황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속상해하고 아파해주면 그만인 상황이니까.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을 만나면 단순히 무시해 주자. 그 사람은 스스로가 아픈줄 모르고 그저 자기만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일런지 모르니까. 스스로 아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때엔 그것을 들어주기만 해줄 사람조차 옆에 없을테니까.
그러니 아픔을 느끼면 슬퍼하라. 울고 그 아픔속에서 허우적거려봐라. 스스로 지칠때까지. 무언가에 기대어 슬픈일을 잊으려해도 기대어 있던 것이 사라지면 금새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테니까.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는 사실은 상당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니, 내 삶이 다채롭고 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인생이 되겠구나, 찬란하겠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들이자.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니까. 그리고 명심하자. 내 아픔이 완전히 나의 것이듯, 타인의 아픔도 온전히 타인의 것이라는걸.

2020년 06월 08일 일일명언

어떤 날은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도 있죠.

-영화 <디태치먼트> 中-

어떤 날일까.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 영화에서 나온 대사인만큼 어떤 영화인지 먼저 한 번 찾아봐야겠다.

"Sometimes we have limited space for others."
-the movie <Detachment>

한글로 번역된 대사를 이렇게 영문으로 함께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부도 되겠지만 이미 번역된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실제 영화에서 나온 그 속의 언어를 그대로 이해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detachment. 무심하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의 단어. 어떻게 보면 객관성, 공평성을 나타낸다는 단어.

학교 기간제 교사 학생 ...
서로서로가 모두를 필요로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이.
가족도 부모도 아니기에 학생이 엇나간다해도 100% 간섭할 수는 없고 간접적으로나마 학생들의 진로와 미래를 함께 고민해 주어야 하는 관계. 과연 이게 쉬운 일일까? 어찌보면 가족간에도 이런 관계는 참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가족보다는 이런, detachment 한 관계에서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주는 방법을 많이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너무 심각한 문제는 부모들이 자녀의 앞날을 방목형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입해서 자신의 삶인양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딱 객관적으로. 현재 나이에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대화로 소통해주고 때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연스레 여길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 명언 처럼, 어떤 날은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날에 포함되는 '남들'이란 가족을 포함하기 때문에, 영화 제목처럼, 일부 내용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나 자신'일테니까.
처음 이 명대사를 보았을 때에는 어째서, 어떤 일이길래 남들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때가 있는걸까 궁금했는데 영화부터 검색해보고 어떤 상황일지 함께 떠올려보았더니 답이 나왔다. 내가 남을 배려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민해보고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 한다면 당연히 남들을 배려해줄 수 없으리라.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그 선택에 따르는 대가, 성취 모두 나의 것이므로. 그러니 나도 이런 마음 가짐으로 신중하고 주변 사람들도 잠시 거리를 두고 지켜봐주는게 가장 좋지 않을까?

여유가 되는 어느 날, 꼭 찾아서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더 생긴 아침이다.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자. 온전한 내 하루를 가졌음과 이른 시간에 열심히 일어나 풍경을 찍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사하자.

2020년 06월 07일 일일명언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어떤 일도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오귀스트 로댕-

모든일에는 이유가 있다. 라고 스스로의 좌우명을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좀 더 구체적인 좌우명을 만들어 주는 명언.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단, 그 일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나는 그동안 단순한 일에도 이유가 있어서 모든 일에 열심히고 싶었다. 때로는 열심히 하지 못한 어떤일들은 또다른 동기부여가 될수도 있다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곤 했다. 실제로 우연히 버스를 놓쳤는데 다음 버스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기도 했기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10번 중 5번 정도.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스스로의 스케줄이 계획대로 되길 바라며 준비하고 살아온 것도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좋게도 좋지 않게도 스스로의 좌우명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다. 막연하게 모든 일에 의미부여해서 포장하지 말고, 속상한 일만 보여도 알고보면 나중에 그 경험한 일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이번 명언.

그렇다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일단 스스로 경험한 일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기억할 줄을 알아야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게 될지 모르고, 어떤 순간에 갑자기 그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해야할지 파악해야 하니까.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진과 글.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역시 그 두가지가 최고일 듯 싶다.
우리의 경험들은 언제 어느순간 사용하게 될지 모르니 일상을 모두, 최대한 사소한 것까지도 기록하고 지내는것이 좋겠다. 원해서든 원치 않아서든 경험안 사용하게 될테니까. 그러기 위해 역시 매 순간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 내 경험은 무릇 스스로의 습관이 알맞게 버무러진 행동과도 같은 거니까.
쉽게 이해해면 지금 이런 글을 끄적이는것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발판이 아닐까. 뭐라고 쓰는건지 모르겠어도 스스로의 마음이 이끄는대로 끄적이고 메모하는 것. 비가 쏟아지면 당연히 집에만 있었을 사람이 무조건 날이 밝아오는 것을 찍겠다며 차를 타고라도 밖에 나오는 것. 어디에서 찍어야 제일 적합한 오늘의 하늘을 찍을 수 있을지 몇번이고 움직여 보는 것.

오늘의 이 빗속 시간은 앞으로의 나에게 비가 내려도 운치있게, 느낌있게 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고 나는 그 색다른 느낌을 언젠가 또 받고 싶은 날이 오면 같은 행동을 하게될테지. 다행히도 스스로가 그 시간을 낭비했다고 여기지 않을거다. 무턱대고 나왔지만 일단 나오고 보자는 마음 덕분에 빗소리도 가득 듣고, 담고. 그 풍경까지 담을 수 있었다. 얼마만의 멍때림인지 마음도 차분해진다. 그동안의 경험도 분명 현명하게 사용 할 수 있게 될테지만 이 글을 적은 오늘의 아침이 가져다 준 빗소리와 풍경이 더 선명히 머릿속에 기록될 것 같다. 블로그에 끄적이기도 했고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들었으니 이제 어느날 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할 일만 남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쉬었던 스스로의 안정을 시간낭비로 만들지 않도록 하자.

2020년 06월 05일 일일명언

무조건 나이가 많다고 하여 현명한 것이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지는 것일 뿐.

-헤밍웨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며 살아가는것 같다.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현명해지는가? 라는 부분에 대하여.
단순히 나이가 많아져서 현명해지는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삶을 살아가며 겪었을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배운것들이 있을것이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노하우도 깊이있게 쌓여있을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무언의 조언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분명 그 사람이 현명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나이가 많아진 사람이 현명해지기 위해 살아왔다기 보다, 지금까지 겪었던 수모나 실패의 경험들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하여 조심히 한 발 한 발 떼어 나간 것이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그것이 줄어들리는 없으니까. 그저 위험을 피하고 조심히 지내기 위해 삶을 겪어내다보니 어느샌가 조심성이 많아짐과 동시에 삶의 질이 높아졌을 수도 있다. 그런 모습이 아직 지혜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기에 현명하다고, 좋은 방법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일테지
어찌보면 요즘 시대엔 아쉬울 수도 있나 싶다. 현명하게 위해서는 위험을 피하며 좋은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도 있지만, 가끔은 위험데 맞부딪히며 실패와 고난을 겪으면서 지혜를 쌓을 수도 있을테니까.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거의 대부분이 안정적인 것을 좋아해서 주어진 삶에 자기 자신을 끼워넣고 살아가는게 아닐까 싶다. 자신이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데도 경제력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취미를 위해 마음은 없지만 열심히 몸담그 는 '일'이라는 것.
물론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것이지만, 때로는 분명 느낄 것이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 속에서 살아가다간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버릴 것이란 걸.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살아가더가도, 가끔은 특별한 일을 하자. 엄청 크게 대단한게 아니라도 나 하나에겐 정말 큰 만족이 될 수도 있으리라ㅡ 슬슬 조심성만 강해져서 경험이 부족한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건 무얼까? 사소한 일상같아도 주변을 새로운 시선으로 둘러보기도 하고, 만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인사 건내며 다니는 단순한 일에서도 시작한다 .

2020년 06월 04일 일일명언

해버린 일을 없었던 것으로는 못해.
중요한 건 그 뒤에 어떻게 하느냐야.

-드라마 <심야식당>中

'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 합시다-' 하는 노래가 자연스레 같이 떠올랐다. 내가 늘 생각하려 노력하기도 하는 마인드.

이미 지나간 일이 후회스럽든 정말 행복했든 그건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된 다음이다.
후회스러운 일을 지나왔다면 다시 그 후회할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될 것이고, 행복해서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란다면 그 행복함이 어디에서 왔고 그 행복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왔는지 잘 떠올려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시험을 보고 나왔다면, 결과를 채점할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다면 노력한만큼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며 자유시간을 가져보는게 더욱 좋을 것이다. 아마 스스로에게 주는 자유시간이 떳떳하지 못한다면 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일테니까. 결국 지나간 일은 그 전에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이다. 지나간 일로 행복을, 자기 계발을 한다면 지나온 일들은 후회스러움이 아닌 자신의 노력에 대한 땀방울로 보여질테고, 더이상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앞날을 향해 시선을 옮겨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지 분주하게 움직일 지금의 시간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를 아쉬워하는건 없는걸까? 과거의 어떤 모습에 메여 그때처럼 살고 싶다며 생각만하고 지금의 내게 충실하지 못한 부분은 없을까.
다행히 지금은 미래의 내가 후회할 일은 거의 줄여나가는 중이다. 아, 중요한 부분이 아직 덜 고쳐졌다. 불필요한 핸드폰 사용.

아침 운동 후에 일기쓰고 샤워하고 미라클 모닝 루틴을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그 과정에 핸드폰을 쳐다볼 일은 만들지 말자. 폰으로 타임랩스를 찍어 열심히 아침을 보내는 모습을 기록하기만 하자.

그것만 잘해도 지금의 내가 더욱 만족스러운 아침을 보내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

시작은 당장 지금부터. 일기를 쓰면 씻고 나가 바로 폰은 삼각대에 거치시키자. 그리고 열심히 기록해보자 요즘의 나와 요즘 보았던 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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