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14일 일일명언

우리 모두는 시한부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겐 가장 젊은 한때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中

누군가 말했었지, 아니 과거의 조상님들이 그래왔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

열심히 살고 유유자적하듯 여유있게 생을 살아가라.. 이렇게?

열심히 벌고 헤픈데 쓰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저 명언과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생이 영원할것처럼 살지 말고,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살아가라고.

우리는 당장 신체건강하고 건강검진 결과도 아무 이상없다고 해도, 그 검사를 마치고 밖에 나가는 길에 넘치는 위험속을 휘젓고 다니게 되니까.
스스로 먹는거 챙기고 조심해서 살아가면 되지만 우리 사회환경은 그렇게 녹록치 않은곳이니까.

아무리 평생 방어운전해도 비상식적인 운전자들에 의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좋을것 같다. 그렇게 해야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욱 알차게 사용할 수 있을것도 같네.

사람은 대부분 무언가 무한정이라고하면 계산도 없이 욕심을 부리게 되니까. 쉽게 봐서 무한리필 뷔페만 가도, 평소 자기의 양을 알던 사람이랴도 무시해서 더 먹고, 결국 음식를 남기게 되지 않던가.
그 남겨진 음식은 어떻게 되나. 결국 버려진다. 우리 삶도, 인생의 시간도 막무가내로 퍼담는다고 해서 무한으로 담을 수는 없다. 결국 남겨지는 시간이 생기고, 그 남겨진 시간들은 가차없이 버려진다.
이렇게 지나가고 남겨지고 버려지는 시간들의 계산은 우리가 죽을때가 아닌 지금 이순간 부터 온전히 느껴야겠다. 아주 짧게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될테니까.
아침에 늦잠을 자면 그만큼의 시간이 잠으로 사라지고(수면의 질에 도움을 준다면 모를까 대부분 게으름에 얼버무려 버린 시간),
원래 계획도 하지 않았던 핸드폰 사용, 무분별한 sns 사용 등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시간들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들을 모두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살아낼 수는 있지 않을까.

여러 좋은말들 처럼, 그 순간에 존재하자. 그 시간을 살아내자. 지금 이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별것 없고 불필요한 시간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스스로에게 가장 깨어있는 시간이니까.

순간마다의 욕구와 충동에 정신을 팔지 말자.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가려는 도둑에게 웃으며 시간을 퍼주지 말자.

당장 무슨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들을 살아간다고 여기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그 순간의 시간들을 알차게 살아가자. 할 수 있다면 주위의 감사한 사람들과 함께

2020년 07월 12일 일일명언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

-켄 키지-

사과를 보면 알 수 있는 씨앗의 수. 세어볼 수도 있는 씨앗의 수는 눈에 보이지만, 이 씨앗으로 몇개의 사과가 만들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이 숫자는 결국 시간이 지나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

처음에 명언만 보았을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던 이 말의 의미는 지금 눈에 보이는 일에 열정을 가지면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당장에는 알 수 있지만, 그 결과가 가져와줄 나비효과는 알 수 없을거란 이야기.
그리고 눈에보이지 않는, 보여도 너무 작아보이는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 할때 중요한건, 스스로가 작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게 아니라, 이 작은 일이 지금은 이렇게 사소해보이지만 훗날 어떤 나비효과로 커다란 일이 되어 올지 생각해야한다는 것.

나부터 잘 생각해야겠다. 외국에서 어느 교수가 서양과 동양권의 자신감,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보았을때에도 서양에선 결과가 크든 작든 성적이 좋든 나쁘든 항상 칭찬하고, 당사자도 자신의 성적과 상황이 긍정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아주 많은데
동양에선 겸손이 미덕이라는 인식과, 이미 주변에서도 잘하면서 이정도는 잘 못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 덕분에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과소 평가 하는 경향을 보인다.

짧게 하면
서양권은 과대 평가 성향
동양권은 과소 평가 성향
듣고보니 그랬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새벽 4시마다 일어나서 운동장을 1시간 동안 걷고 그러는 중에 사진과 명언을 이용해 일기를 쓴다. 스스로 만들어낸 의무감과도 같은 일이지만, 이걸 계속 유지한 덕분에 제법 좋은 습관을 형성시켰다. 더 발전하기 위해선 이 모든걸 간결하게 기록하고 준비해야겠지만, 일단 스스로 잘 하고 있는건 꼭 인정하고 칭찬하며 살자.
그러는 한가지 방법이 기록이니 꼭 잊지말자.

지금처럼 아침 운동을 마친 후에 올리는 일기들이 요즘의 내 자존감의 근원이고, 대부분 이시간에 올리게 되는게 많으니 어떤 계획을 세워도 이 시간에 맞춰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유지하자.

지금 습관을 잘 이어나가고 있는것처럼.

2020년 07월 11일 일일명언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자연스레 곰돌이 푸가 했던 대사로 생각을 했다. 비슷한 말을 책에서 본건지, 아니면 내 머릿속에 이런 긍정의 대명사가 앨리스보다 곰돌이 푸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것만큼은 확실하다.

내 기분도 그렇겠지. 내가 느끼는대로 그 느낌이 기분으로 표현되겠지.
각자 처한 상황이나 생기는 일마다 대처가 달라지는건 애초에 어떤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것에 달라지니까.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돈이 많으면 행복할 일이 많다고도 한다.
그럼 돈이 부족하면 행복한 일도 줄어드는걸까.

왜 그럴까. 결국 비교에서 찾아온다.
애초에 비교를 하지 않으면 내것이 큰지 작은지 모른다. 그냥 내 양에 차는지만 보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의 빵이 내게 충분한 포만감을 주는지보다, 옆 사람의 빵보다 큰지 작은지를 보고 산다.

내가 보지 못한걸 누구는 보았고,
내가 가지지 못한걸 친구는 가졌다.
나는 저렴한걸 사서 먹는데 저 사람은 고급진 재료로 먹는다.

글자만 봐도 비교에 의해 속상해지는 상황. 누가 만들었을까? 최초로 비교를 시작한 사람때문일까?
아니, 그냥, 내가 그렇게 만든것일 뿐이다.

부쩍 스마트폰 이전의 시간들을 그리워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와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이 올린 글도 읽었다. 우리는 편해진 세상에 살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진짜로 필요한게 무엇인지 모른다.
당장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넷플릭스 영화를 찾아볼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던 책을 읽고,
멜론 top100에 있는 음악을 들을게 아니라 내게 힐링이 되던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가 그립다면 자연의 가운데로 들어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건데-

스마트폰으로 편안해진 세상은 그에 비례하는 비교를 가져왔다.
당장 만나는 친구도 아닌데 저 멀리에서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롭게 사는지 손바닥만한 액정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굳이 몰랐으면 기분 상할일이 아닌데, 괜한 비교 한 번으로 사람들은 주눅들고 자신의 현재를 비하하게 된다.

그러지 말자. 추억에 사는걸 좋아하면, 추억에 살자.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을 만나자. 그 사람의 sns를 쳐다보면 좋아하던 사람도 미워하게 될지 모른다. 그 사람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비교때문에.

그러니 매일 내 기분은 행복으로 하자. 일단 내가 행복하면 비교하는 횟수도 줄어들고, 비교를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이고 나는 나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

지금의 나도 충분히 멋지고 행복하게 잘 하고 있으니까.

2020년 07월 10일 일일명언

인생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 실험 횟수가 많아질수록
당신읃 더 좋은 사람이 된다.
-랄프왈도 에머슨-

언젠가 이 명언을 적으며 스스로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이미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지금, 한가지 실험은 성공한듯 보이고 다른 실험들은 계속 게으름과 기억력에 의해 잊혀졌다가 다시 실행되었다가.. 왔다갔다 하는 중.

일단, 매일 쓰는 명언이 쓰는 날짜와 일기속의 날짜가 일치되어야 더 쓰기 좋을것 같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설프게 적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일단 하루 하나씩 쓰는 일기는 무조건 아침 운동 직후에 해야겠다.
운동 하고 숨고르며 걸을때.
환경정리를 먼저하면 개미가 잔뜩 모이기에 일기부터 쓰는걸로.

만약 이 시간에 안쓰면 의식해서 일기쓰는 활동이 잊혀지기 십상이기때문에.

스스로의 만족과 건강을 위해 시작했다면 이제는 그 이상의 욕심을 노려봐도 좋을것 같다.
기록을 남겨 더 보기 좋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의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도록.

일단 내가 꾸준히 해서 그 효과를 보여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까말까이니까, 나부터 이 좋은것들을 당연한 습관으로 익혀주자.

2020년 07월 09일 일일명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
-체 게바라-

우리는 가슴속의 불가능한 꿈을
리얼,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 되자.

불가능한 꿈이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일뿐이라고 여기자.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하면 좋을지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자.
최종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하여 행동하자.

가슴속에 품는 불가능한 꿈은 당장에 불가눙해보일뿐이고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란걸 잊지말자. 스스로도 이걸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고, 그냥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버리면 진짜 현실에서만 사는 리얼리스트가 될테니까. 현실에 안주하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현실을 살면서 환상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를 이뤄내는 리얼리스트가 되자.

지금의 내가 가슴속에 품고있는 불가능한 꿈이 무얼까-?

요즘의 나는 어떤 변화를 추구한다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돌아보게된다. 일단 나먼저 불가능한 꿈으로 여긴것이 무언지 찾아봐야겠다. 자연스레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어 이룰생각은 하지 않고 쳐다만 봐온것이 무엇인지.

아마 한두개가 아닐테니 전부 기록해놓자.
그리고 기록하며 체크해주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기록들이 될테니까.

2020년 07월 08일 일일명언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대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뿐이다.

-장 폴 샤르트르-

스스로 이해하는대로 존재하고
바라는대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인간.

하지만 스스로 이해하는데도 행하지 않고
바라는대로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닐까.

순수 그 자체라면 자연의 섭리인듯, 스스로 이해하고 바라는대로 존재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살아간다면 모두가 성인군자가 되겠지만, 인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뇌의 활용도 조차 100%는 커녕 50% 이상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그정도가 되려면 더 머리가 아프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나 역시 스스로 이해하고 원하는대로 존재하고자 생각은 수도 없이 하였지만, 결국 나태함에 못이겨 아침시간들과 수많은 여유시간들을 허투루 보내왔으니까.
최근 몇달째 아침일찍 일어나 하늘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우연히 했던 알바 한 건이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별 대수롭지 않은 짜투리시간이라 생각한 시간을 모아 단기 알바를 하는데에 사용했더니 현재 일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알바비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내게 필요한 상식들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고, 큰 책임감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마감기한을 지키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여유라는 느낌이 드는 시간들은 모조리 끌어 모아 최대한 활용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니 내가 마음먹으면 못할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경제력을 높여주고 책임감과 유익함까지 있었던 단기알바는 열흘정도 걸리며 종료되었고, 스스로의 열정도 거기까지였다.
참 아쉬운데 그걸 되살릴 방법을 도무지 찾지 못했다. 블로그 하는 것도 그것과 비슷하다고는 했지만 금액의 차이도 있거니와 눈에 보이는 변화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게 노트에 모두 적기. 그리고 체크해나가기. 하지만 노트를 정하기만 하고 대략적인 가이드 라인만 머릿속에 그린채 시작하질 못했다. 어떻게해야 완벽할까..하면서.

사실 완벽한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데 자꾸만 완벽을 기하려 하니 피곤하다 피곤해.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어떻게든 해보자고 발버둥치는 중이니 스스로를 믿어주자. 변화가 아주 없는게 아니니까. 발버둥 치는만큼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하고 있으니까.

마치 중문에서 맥주병이던 몸을 조금씩 뜨게 만들었던 수영 수업처럼. 물에 뜨기 시작하니 발을 움직여 조금씩이라도 움직여보려 노력하던 그때의 자잘하지만 발전이 있었던 스스로의 노력처럼.

분명 잘 해낼거야. 그러니 힘내자.

스스로 이해하는대로 존재하고
스스로 바라는대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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