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날 수 있을지 물음을 품었던 사람들이, 그 당시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면서 생긴 나비효과.
글로벌 시대가 된 지금.
아직까지도 배를 타고 위대한 항해를 해야했다면, 배가 좀 더 고급스럽고 대중적으로 변했으려나-?
비행기에겐 어쨌든 시간 단축이라는 큰 이점이 있기에 배만 있었을 상황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으리라.
바다든 하늘이든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고 그런면에서 땅 위의 도로라고 큰 차이가 있는것은 아니다. 사고율로 보면 비행기가 가장 안전하다고들 하니까.
2020년. 지금의 나는 어떤 물음을 품고, 어떤 물음표를 머리와 마음에 품어야 할까.
최소한 그 물음이 불가능에 가까울거라고 예상되더라도, 주변에서 미친짓이라고 할지라도 내 의지에 집중하자.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그 어떤 주변 상황도, 그 일의 환경도 일단 생각치말자. 원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덤벼든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테니까.
라이트 형제의 우리가 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너, 날 수 있어? (나 일 수 있어 ?) 라는 언어유희로 재탄생한것 처럼 내가 시작하는 일이 처음엔 미친짓이라도 돌아보면 분명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무언의 변화와 재미를 던져줄 수 있을테니, 최소한 스스로의 물음은 외면하지 말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답하고 긍정의 행동으로 그 물음을 함께 해결해버리자.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생각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를바 없으니까.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원한다고 느꼈다면 실행에 옮기자. 얼마나 걸릴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먼저 짚어보려말고 사서 걱정하지 말자.
나를 만나는, 나와 어떤 인연으로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단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고, 그 옆에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게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다.
그렇게 살아온게 나였고, 지금은 그런 모습이 내 적성이라며 업을 찾고자 한다. 최소한 그 업은 내 진심을 담아서 할 수 있을 테니까. 운동은 좋아하지만 전문적이지 않고, 컴퓨터 학교를 나왔으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관광분야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관광과 관련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러명을 만나 어울리는 운동을 좋아라 하고, 컴퓨터학교에서 배운 사소한 단축키들이 어떤 업무를 할때에 큰 도움이 되곤 한다. 관광분야를 전공해서 그런지 나는 이 제주도가 좋다. 개발이 아닌 행복으로 모두가 즐거워졌으면 좋겠는데 사실 쉽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제주에 놀러오는 사람이 있으면 내 경험과 과제를 하며 습득한 정보들을 쏟아낸다. 일과 완전히 관련있는 일이 아니어도, 이렇게 쏟아낼 수 있는 것들이 일상에 있다. 그런데도 업까지 내가 정말 좋아한다는 일로 해야하나...음 나는 어쩌다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렇게 바라보니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것 같다. 경제활동을 무엇으로든 하면서, 대신 그 일을 할땐 거기에 제대로 집중을 하고. 마음이 움직여서 즐거워하는 여러 일들을 그 외의 시간에 하면 된다는 조언 한마디가 들려온 듯 싶다.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해야지. 내가 일을 할때만 더 제대로 행복을 전할 수 있는 그런게 아니라, 일을 할때이든 평소에든 만나는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줄 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게 진정한 마음이고 가식이 아닌걸테니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아침, 출근길에 만난 여러 차들도 그러하지. 내가 방어 운전을 한다면 누군가, 불특정 다수 역시 사고가 안날테고 그들도 한두명정도는 나와같이 운전을 더욱 신경써서 할테니까. 그렇게 발전해나가는 것인가 보다. 그냥 일상에서도 매장에서도 운전하는 도로 위에서도.
왜 사는걸까. 태어나는것은 의지가 있었다고 보기 힘든데. 태어나고 살다보니 사회에 내던져있는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부정적으로만 방향이 잡힐 듯 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거라면 정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강하다.
그저 살려고 태어난게 아니다. -의지에 상관없이 태어났어도 그냥 숨쉬며 살아만 있는게 태어난 의미가 아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려고 태어난 것이다.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 태어났다.
태어난것은 나도 모르게 태어났다고 해도,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중에 하나로 나는 태어났고, 가족과 함께 생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어느새 사회에 내던져져, 뭣이 중헌지를 자꾸만 생각해보며 살아가게 된다.
뭣이 중할까. 모두가 그걸 찾느라 온 시간을 쏟는다. 주어진 기회를 전부 사용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걸 모른다. 진짜 중한건 자기 자신에게 있고,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대부분 밖에서 찾으려한다. 누군가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뭐가 중요한거냐고.
그 누구의 조언 보다 이 명언이 제일 와닿는다.
우리는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행운이든 행복이든 찾기 위해선, 그냥 기다리면 되는게 아닌걸 사람들은 알까. 가만히 있어도 기분좋게 모든게 만사형통, 잘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아주 소수만 그런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니 대부분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는 사람이 고개만 돌려 바라봐고 울상을 짓고 있는게 보인다.
나라고 그들에게 대단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다. 나 역시 그 의미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중이니까. 대신 열심히 노력하는 지금의 생활이 확실히 나 자신에게 활력을 준다는걸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의미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렇게 하면 정말로 인생이 의미있어 지는지. 아침, 아니 새벽 4시 무렵 일어나 날이 밝아오는걸 바라보며 운동장을 달리고 해안가를 걷는다. 이제는 걷기만 하고 있지만 아침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 스스로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원동력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덕분에 나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한 사람, 대단한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으니까 일단 겉보기론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더 중요한건 그 껍데기 속의 내가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만족하는가에 있겠지. 나름대로 지금까지 어떤 미라클 모닝을 해왔든 지금이 가장 활발하고 절대적인 습관처럼 이어지고 있다. 새벽 4시.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그 알람을 끄기위해 세면대 앞으로 가서 선다. 정해둔 사진을 찍으며 알람을 끄고, 바로 앞의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세수를 한다. 밖은 어둡지만 나의 하루는 이미 시작되었음을 몸에게 알려준다.
아침 운동에 필요한 옷차림을 하고, 밝아오는 아침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는 도구들을 챙긴다.
최대한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환경정리를 할 봉투까지 챙기면 출발 준비 완료. 학교까지 걸어서 10여분 남짓, 카메라 설치하고 스트레칭을 하면 5분여가 더 소요된다. 몸이 풀렸다 싶으면, 유튜브로 노래를 튼다. 최근들어 자주 듣는건 가요를 1.5배 정도 빨리 재생하여 모아 놓은 노동요라 불리는 노래들. 달리기 대신 걷기를 하는 아침 운동에 뭔가 모를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노래가 정해지면 갤럭시 워치나 핸드폰으로 걷기 기록 시작. 5km가 되면 안내멘트가 나오기로 되어 있으니 다른 생각하지 않고 걷는다. 달리듯 걷는다. 날아가듯 신이난듯 걷는다.
5km를 지났다는 안내가 나오면 서서히 걸음 속도를 줄인다. 완전히 멈추면 신이났던 다리가 갑자기 힘이 풀릴지 모르니, 서서히 신나는 걷기시간이 끝나간다는걸 알려준다. 그렇게 한바퀴 남짓을 더 걷는다. 운동용 장갑을 끼고 철봉 옆에 선다. 촬영 할 핸드폰을 거치하고 촬영 시작. 자세도 어색하고 턱걸이 횟수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시도한다는 자체에 의미를 둔다. 제대로 된 자세로 하기엔 아예 한개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일단 억지로 몇개씩 채워본다. 영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 날 몇개를 했는지, 자세는 어떤지를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있음이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는게 가장 크다. 처음엔 한개도 못하다가 이제 3,4개까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부분을 기억이 아닌 영상으로 돌려 볼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커진다.
아직 며칠 안되었기에 변화도 크게 보이지 않지만 당장의 변화를 보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턱걸이를 마치면, 핸드폰을 가로로 돌려 옆에 거치한다. 어깨를 살살 풀어주고 팔굽혀펴기 시작.
바닥도 아니고 손을 짚는 곳도 애매하지만 일단 이렇게라도 시작한다. 처음엔 30개 20개 10개를 해보다 50개 20개 10개로 했다가 이젠 50개 10개 10개 10개 10개... 하는 식으로 진행중
끝으로 갈수록 다리 하나를 앞쪽에 놓아주지 않고는 팔꿈치기 부들부들거려 올라갈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진짜 근육이 생기고 힘이 늘어나는것이란걸 알기에 억지로라도 움직인다. 한 번 더 팔을 접어본다.
그렇게해서 운동이 쌓이면 잠시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에 몸이 반응을 한다. 오늘 운동을 했구나. 많이 움직였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인식이 된다.
열심히 보내보고 있는 하루의 아침을 메모해보니 새삼 정말 알차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좋다. 잘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이것을 유지하는것.
하자고 마음먹은 일을 계속 미루고만 있는 내게 던져주는 말같다. 내게 온 기회를 일처럼 느껴서 자꾸만 미루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래도 꼬물꼬물 움직여보자고 노력하는 중이니 좀 만 더 힘내보자.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지금 두시간도 잠을 안잤는데도 날이 밝아오는걸 찍겠다며 열심히 밖으로 나왔고, 그곳에서 자연스레 걸음을 떼었고, 그 걸음의 배경음악으로 노동요를 틀어준 덕에 빨리걷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진짜 일터에서든, 취미속에서든, 일상속에서든 우리에겐 정말 많은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만큼 기회도 그 사이마다 숨어있다. 기회가 너무 적어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변명 할 수 없다.
기회가 작업복을 입어서 일처럼 보인다면 어떻게하면 좋을까? 행복이 꽃말인 세잎클로버들 속에서 행운이 꽃말인 네잎클로버를 찾듯이 세잎들은 뭉게머리면서 네잎클로버만 찾는게 방법일까? 나라면 세잎클로버들 속에서 행복을 가득히 누리면서 우연히 옆에 있던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함께 얻어갈생각이다. 일처럼 보이는 기회 역시 똑같다.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하자. 그건 응당 우리가 급여를 받으며 제공해야할 노동이니까. 해야할 일을 하는것 뿐이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린 해야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작업복을 입고 있던 기회까지 찾아내게 될것이다. 일거리들 속에 숨은 기회를 찾겠다고 쌓여있는 업무는 처리 안하고 들추어 보기만 하면서 기회를 찾는 사람에게 과연, 기회가 그 모습을 보일까 ?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상황을 맞이하는게 가장 좋다. 할일을 하다가 기회를 잡고 행복을 누리며 살다 우연히 행운도 잡자.
기회만 찾겠다고 가만히 있는다면 작업복이라도 입고 근처에 숨어있던 기회마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떠나갈것이다. 그 어떤 기회이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우리가 아는 어두운 밤은 길때도 있고 짧을때도 있다. 밤을 짧게 느끼는 순간은 주변 사람들 덕분에, 혹은 가로등 불빛이나 밝은 달 빛 덕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럴땐 대부분 그 밤을 즐기고 있을뿐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밤이 유독 길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순간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밝아지지 않을까봐 겁이나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상황. 이렇게 같은 밤도 같은 시간을 지내는 것인데도 누구는 그 순간을 즐기고 누구는 그 순간을 두려워한다. 반 고흐의 저 한마디는 후자의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좋은 메시지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밤을 마냥 즐기는 사람에게도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메시지가 된다. '그 밤을 즐기는 것은 네 자유지만,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현실적으로 밤은 느낌상 깊더라도, 혹은 얕더라도 분명히 지나간다. 어둡던 밤은 밝아오는 새벽과 바톤터치를 할테고, 새벽은 태양을 데리고 온다. 그 덕분에 이내, 세상은 밝아진다. 아무리 구름들이 태양이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다 하더라도 밝아오는 온 세상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니, 태양이 보이지 않더라도 안심하자. 밤은 지나갔고 우리의 날이 밝아왔으니까.
뭔가 감이 오지 않는 길을 가다가 긴 터널 같은 공간을 만난다고 한다면, 그래서 밤이 지속되고 밝아오는 태양을 만나기 힘든 상태라고 느낀다면 제대로 생각해보자. 긴 터널이라면 더욱이, 무조건 중간마다 쉬어갈 수 있는 길이 있고, 불빛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져있다. 어찌보면 어두운 터널을 지난다고 하겠지만 반대로 365일 24시간 밝은 빛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곳을 지나쳐왔을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터널의 중간에는 꼭 대피할 수 있는 통로가 있고, 우리의 어둠또한 그렇다.마냥 태양을 기다리다가 오래걸리는것 같다면 자기만의 빛이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보자.
그렇게 능동적으로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레 어둠을 만나도 곧 빛도 찾아오리란걸 깨달을테니까. 어두움을 두려워 말자. 그 어둠에서도 가만히 눈을 뜨고 근처를 천천히 훑어보면 우리의 눈은 적응시로 천천히 근처를 보여줄테니. 어느 어둠이든 완전한 어둠은 없고, 어떤 두려움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만약 완전한 어둠과 영원한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의 산물일뿐. 스스로 만들어낸 어둠과 두려움에 속지말고 진짜 어둠이 찾아와도 스스로 빛을 만들어 그것들을 헤쳐나가자. 묵묵히, 앞으로.
누가 감히 남의 통증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다.
-박완서<살아있는 날의 시작>中-
통증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남이 그 통증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는 말 중에 '말도 못하게 아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통증을 느낀다고 하곤 한다. 아무리 동일한 업무를 해보았고 같은 아픔을 겪어보았다고 한들 똑같이 그 아픔에 대해, 통증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단언컨데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상황과 자라온 환경, 함께 있었던 사람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서 같은 아픔, 통증을 느끼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타인이라면 그걸 어떻게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거든,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듬어 주고 싶거든 입을 열지말고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귀를 열고 얼굴의 표정을 풀어라.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경청하는 일과 최대한 그 마음을 이해하며 느껴지는 것을 표정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니까. 절대 입은 열지않되 마음만은 활짝 열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쉬운일이 아닐뿐더러, 그것이 속상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라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어지거나, 그 상황을 상상하며 분석하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될테니까. 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순간, 당신은 앞에 앉은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는것엔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그저 나라면 어땠을지를 떠올려보며 어떤 대처방안이나 앞으로 어떻게하면 좋을지 대답해주려 할테니까. 아픔을 느낀 사람은 온전히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고 슬퍼하고 잊을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권리를 양도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아픔이 온전히 자기의 것임을 말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구든 속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생각을 제대로 하자. 지금 이 상황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속상해하고 아파해주면 그만인 상황이니까.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을 만나면 단순히 무시해 주자. 그 사람은 스스로가 아픈줄 모르고 그저 자기만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일런지 모르니까. 스스로 아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때엔 그것을 들어주기만 해줄 사람조차 옆에 없을테니까. 그러니 아픔을 느끼면 슬퍼하라. 울고 그 아픔속에서 허우적거려봐라. 스스로 지칠때까지. 무언가에 기대어 슬픈일을 잊으려해도 기대어 있던 것이 사라지면 금새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테니까.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는 사실은 상당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니, 내 삶이 다채롭고 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인생이 되겠구나, 찬란하겠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들이자.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니까. 그리고 명심하자. 내 아픔이 완전히 나의 것이듯, 타인의 아픔도 온전히 타인의 것이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