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30일 일일명언

작은 일에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은 피해라.

-사무엘 존슨-

작은 일은 무얼까
거창한 말은 무얼까

시작부터 의문을 품으니 생각을 적기가 참 어렵다 하하

그래도 머리를 열심히 굴릴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좋다.

작은 일은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크게 느끼지 않는 일이겠지?
거창한 말은 과대포장같은게 아닐까.

작은 일이라고 사소하다고 하기 싫고
거창한 말이라 해서 과장된 말이라고 단정짓고 싶지 않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싶다.

무튼 일상의 자잘자잘하지만 자주 있는 일들을 하면서, 뭔가 아주 크고 중요한 일을 하는듯, 과하게 포장하면 유명무실하다. 라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텅빈 그런 것.

사실 작고 사소한 일도 꾸준히 열심히 해내면, 과장하지 않아도 튼튼하고 크게 보여지지 않을까?

남이 알아봐 저길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그걸 너무 과하게 원하면 관심종자가 되어버린다. 그럼 진짜로 잘한 일이라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

마치 지금 내가 일상을 기록하고 아침을 열심히 살고 있는 순간들을 말하는것 같아서 스스로도 뜨끔해진다.

괜시리 나 열심히 살고 있어요. 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지금이런 모습을 대놓고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더 많다. 자랑하고 싶은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

그러니 나는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모아 일단 진정성있게 지금을 기록하자. 남기고, 기억하자.

지금의 내가 사람들에게 모르는 존재일지라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는 것보단 나을거고
분명 훗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고맙다고 생각할 날이 올테니까.

로또 맞은듯 한 순간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 평생을 스스로에게 감사하며 살고, 그 이후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될테니까.

일상을 소소한듯, 중요하게 살아내고
이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면 최대한 담백하게 담아내자. 이 일상 덕분에 내가 있지만, 아직 그렇게 큰 일은 아니라고. 왜냐하면 내가 아직 큰 사람이 되진 못했으니까.

30대가 훌쩍 되어버린 지금을 너무 속상해하기 보단 시간참 빠른것 같네.
근데 아직 인생 반도 안살았네 생각하면서 지내주자.

사실 초반부는 중후반부를 위한 시작에 불과하고, 내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이제야 블로그 이름이 납득이 간다.

이렇게 또 '이제 시작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니. 나는 평생을 나만의 기준으로 시작과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가는구나.

2020년 06월 26일 일일명언

뒤로 갈 생각이 아니거든
절대 뒤돌아 보지 마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링컨 전 미국대통령의 명언도 함께 떠오른다.
나는 천천히 걷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절대 뒤로 가진 않습니다.
-에이브러헴 링컨

천천히 걷기에 다른 이들보다 느려보이고 뒤쳐져보일수는 있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고 했던 명언. 그리고 느릴지라도 포기하고 뒤돌아가진 않는다는 이야기.

오늘의 명언도 같은 의미로 느껴진다. 뒤로 돌아갈 생각인게 아니라면, 느리더라도 남들보다 쳐져보이더라도 일단 걸어라. 나아가라. 뒤돌아보지 말아라.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은 직접 경험하고 바라보면서 나아온 길이기 때문에 고민 걱정 보다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가득할텐데, 앞을 알 수 없는 길을 나아가자니 걱정이 앞설것이 분명하다. 그런 와중에 잠시라도 뒤를 돌아본다면 익숙하고 편안한, 이미 지나온 그 길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니 돌아보지 말자. 생각해보면 지나온 길도 걱정이 앞섰지만 지나고 보니 익숙해지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었으니까.

무슨 사정이 생겨서 돌아가야하는게 아니라면, 아프고 힘들더라도 뒤돌아갈 생각을 하기 보단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자리에서 쉬었다가 가는게 더 나을 수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이 길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던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돌아서는 순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기회와도 같다.
붙잡으면 그걸 잡고 있는 동안은 도전 할 수 있지만, 돌아서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다음 기회는 언제 어디에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잠시 힘들거나 게을러지는 순간이라면 명심하자. 그 순간은 잠깐이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의 후회가 될지도 모른다는걸.
미래를 생각하며 스스로 택한 순간의 선택 덕분에 평생을 승승장구하며 멋지게 살아갈 것인가
잠깐의 나태함에게 순간의 선택을 내어주고 평생을 후회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2020년 06월 25일 일일명언

소설이 존재하는 유일한 정당성은,
삶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발견하는 데 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이 존재하는데에 정당성을 함께 보는규나..음..

소설은 삶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발견하는데에 정당성이 있다 고 한다.

하긴 글이 너무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을법한 일이라면 소설로 생각이나 할까. 누군가의 경험담처럼 생각하겠지. 소설은 그런면에서 무궁무진한 상상과 창조성을 가득 담고 있는것 같다.
기욤뮈소 작가의 책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도,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읽어내려가다가 평소에 느끼지 못해본 전개가 펼쳐지기 때문이니, 더욱 이 명언에 끌리게 된다.

에세이, 자서전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오며 경험한 것과 느낀 것들을 적어내려가기에 사람들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거나, 나도 힘들었고 그런 기분은 당신만 느끼는게 아니라 대부분이 느끼는 것이라고 다독여주는 책이라면,
소설은 일상에 찌들어있는 사람들이 상상만 해본, 혹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판타지의 세계나 비현실적인 풍경을 생생한 꿈을 꾸는것 처럼 느끼게 해주어 굳어가는 사람들의 생각들을 말랑말랑 해지도록 만들어준다.

다행히 난 두 부류를 모두 좋아해서 자신감도 얻고 다독임도 받고 말랑말랑 마시멜로우같은 생각의 구름들을 전달 받으며 지내왔다.

근데 요새 세가지 모두 차단된지 오래인듯... 너무 현실 주의, 경제력만 신경쓰느라 날카로운 일상을 살아온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안되는건데.

스스로 읽자고 꺼내든 소설을 펼쳐보자.
그리고 빠져들자.
내 삶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부분을 보여줄 감사한 작가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요즘 일상에 찌들었던 스스로를 쉬어가게 해주자.

2020년 06월 09일 일일명언

누가 감히 남의 통증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다.

-박완서<살아있는 날의 시작>中-

통증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남이 그 통증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는 말 중에 '말도 못하게 아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통증을 느낀다고 하곤 한다. 아무리 동일한 업무를 해보았고 같은 아픔을 겪어보았다고 한들 똑같이 그 아픔에 대해, 통증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단언컨데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상황과 자라온 환경, 함께 있었던 사람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서 같은 아픔, 통증을 느끼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타인이라면 그걸 어떻게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거든,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듬어 주고 싶거든 입을 열지말고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귀를 열고 얼굴의 표정을 풀어라.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경청하는 일과 최대한 그 마음을 이해하며 느껴지는 것을 표정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니까. 절대 입은 열지않되 마음만은 활짝 열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쉬운일이 아닐뿐더러, 그것이 속상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라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어지거나, 그 상황을 상상하며 분석하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될테니까. 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순간, 당신은 앞에 앉은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는것엔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그저 나라면 어땠을지를 떠올려보며 어떤 대처방안이나 앞으로 어떻게하면 좋을지 대답해주려 할테니까.
아픔을 느낀 사람은 온전히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고 슬퍼하고 잊을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권리를 양도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아픔이 온전히 자기의 것임을 말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구든 속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생각을 제대로 하자. 지금 이 상황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속상해하고 아파해주면 그만인 상황이니까.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을 만나면 단순히 무시해 주자. 그 사람은 스스로가 아픈줄 모르고 그저 자기만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일런지 모르니까. 스스로 아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때엔 그것을 들어주기만 해줄 사람조차 옆에 없을테니까.
그러니 아픔을 느끼면 슬퍼하라. 울고 그 아픔속에서 허우적거려봐라. 스스로 지칠때까지. 무언가에 기대어 슬픈일을 잊으려해도 기대어 있던 것이 사라지면 금새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테니까.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는 사실은 상당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니, 내 삶이 다채롭고 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인생이 되겠구나, 찬란하겠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들이자.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니까. 그리고 명심하자. 내 아픔이 완전히 나의 것이듯, 타인의 아픔도 온전히 타인의 것이라는걸.

2020년 06월 08일 일일명언

어떤 날은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도 있죠.

-영화 <디태치먼트> 中-

어떤 날일까.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 영화에서 나온 대사인만큼 어떤 영화인지 먼저 한 번 찾아봐야겠다.

"Sometimes we have limited space for others."
-the movie <Detachment>

한글로 번역된 대사를 이렇게 영문으로 함께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부도 되겠지만 이미 번역된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실제 영화에서 나온 그 속의 언어를 그대로 이해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detachment. 무심하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의 단어. 어떻게 보면 객관성, 공평성을 나타낸다는 단어.

학교 기간제 교사 학생 ...
서로서로가 모두를 필요로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이.
가족도 부모도 아니기에 학생이 엇나간다해도 100% 간섭할 수는 없고 간접적으로나마 학생들의 진로와 미래를 함께 고민해 주어야 하는 관계. 과연 이게 쉬운 일일까? 어찌보면 가족간에도 이런 관계는 참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가족보다는 이런, detachment 한 관계에서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주는 방법을 많이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너무 심각한 문제는 부모들이 자녀의 앞날을 방목형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입해서 자신의 삶인양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딱 객관적으로. 현재 나이에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대화로 소통해주고 때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연스레 여길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 명언 처럼, 어떤 날은 남들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날에 포함되는 '남들'이란 가족을 포함하기 때문에, 영화 제목처럼, 일부 내용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나 자신'일테니까.
처음 이 명대사를 보았을 때에는 어째서, 어떤 일이길래 남들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때가 있는걸까 궁금했는데 영화부터 검색해보고 어떤 상황일지 함께 떠올려보았더니 답이 나왔다. 내가 남을 배려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민해보고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 한다면 당연히 남들을 배려해줄 수 없으리라.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그 선택에 따르는 대가, 성취 모두 나의 것이므로. 그러니 나도 이런 마음 가짐으로 신중하고 주변 사람들도 잠시 거리를 두고 지켜봐주는게 가장 좋지 않을까?

여유가 되는 어느 날, 꼭 찾아서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더 생긴 아침이다.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자. 온전한 내 하루를 가졌음과 이른 시간에 열심히 일어나 풍경을 찍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사하자.

2020년 06월 07일 일일명언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어떤 일도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오귀스트 로댕-

모든일에는 이유가 있다. 라고 스스로의 좌우명을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좀 더 구체적인 좌우명을 만들어 주는 명언.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단, 그 일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나는 그동안 단순한 일에도 이유가 있어서 모든 일에 열심히고 싶었다. 때로는 열심히 하지 못한 어떤일들은 또다른 동기부여가 될수도 있다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곤 했다. 실제로 우연히 버스를 놓쳤는데 다음 버스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기도 했기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10번 중 5번 정도.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스스로의 스케줄이 계획대로 되길 바라며 준비하고 살아온 것도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좋게도 좋지 않게도 스스로의 좌우명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다. 막연하게 모든 일에 의미부여해서 포장하지 말고, 속상한 일만 보여도 알고보면 나중에 그 경험한 일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이번 명언.

그렇다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일단 스스로 경험한 일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기억할 줄을 알아야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게 될지 모르고, 어떤 순간에 갑자기 그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해야할지 파악해야 하니까.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진과 글.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역시 그 두가지가 최고일 듯 싶다.
우리의 경험들은 언제 어느순간 사용하게 될지 모르니 일상을 모두, 최대한 사소한 것까지도 기록하고 지내는것이 좋겠다. 원해서든 원치 않아서든 경험안 사용하게 될테니까. 그러기 위해 역시 매 순간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 내 경험은 무릇 스스로의 습관이 알맞게 버무러진 행동과도 같은 거니까.
쉽게 이해해면 지금 이런 글을 끄적이는것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발판이 아닐까. 뭐라고 쓰는건지 모르겠어도 스스로의 마음이 이끄는대로 끄적이고 메모하는 것. 비가 쏟아지면 당연히 집에만 있었을 사람이 무조건 날이 밝아오는 것을 찍겠다며 차를 타고라도 밖에 나오는 것. 어디에서 찍어야 제일 적합한 오늘의 하늘을 찍을 수 있을지 몇번이고 움직여 보는 것.

오늘의 이 빗속 시간은 앞으로의 나에게 비가 내려도 운치있게, 느낌있게 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고 나는 그 색다른 느낌을 언젠가 또 받고 싶은 날이 오면 같은 행동을 하게될테지. 다행히도 스스로가 그 시간을 낭비했다고 여기지 않을거다. 무턱대고 나왔지만 일단 나오고 보자는 마음 덕분에 빗소리도 가득 듣고, 담고. 그 풍경까지 담을 수 있었다. 얼마만의 멍때림인지 마음도 차분해진다. 그동안의 경험도 분명 현명하게 사용 할 수 있게 될테지만 이 글을 적은 오늘의 아침이 가져다 준 빗소리와 풍경이 더 선명히 머릿속에 기록될 것 같다. 블로그에 끄적이기도 했고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들었으니 이제 어느날 이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할 일만 남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쉬었던 스스로의 안정을 시간낭비로 만들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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